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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박 길현 목사 |
1. 들어가면서 드리는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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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식에 오신 내빈 여러분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오늘 우리 학교가 지향해야 할 신학적 방향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하고 많은 교회와 교단들과 그 교단들이 운영하는 신학교들과 이 외에도 사설 군소신학교들이 난립하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또 하나의 신학교를 시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갓 시작한 작은 총노회 교단이 인적 물적 자원도 한없이 미약하다고 할 수 있고, 사회적인 수용성도 미미한 상황에서 신학교를 시작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질문을 스스로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신학은 교회의 도리를 학문하기 때문에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교회의 신학을 위한 신학교를 허락하시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질문에 우리는 타당한 대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상황의 어려움은 신학교의 출발을 결단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 결정적인 요인은 주님이 허락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신학을 배우고자 원하여 요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요청하는 이가 우리의 기준에도 부합한다면, 주님이 신학교를 시작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인 줄 알고 시작하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가 언제가 될지를 우리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열어주기를 요청하는 사람이 의외로 빨리 나타났습니다. 부경 성경 연구원에서 1년간 강의를 들었던 배병길 성도가 신학교를 열어 주기를 요청해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교회 당회장 목사님으로부터 사랑과 애석함이 가득 찬 추천서를 받아서 본 교단으로 이적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주님이 허락하시는 징조인지를 노회 차원에서 숙의를 거듭한 결과 신학교를 시작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두고 영어, 성경, 논술 시험을 치른 후 신학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참으로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수할 수 있는 역량은 있느냐는 의문을 자타가 가질 것입니다. 본인은 학생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도 가져 보았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 질문에 대하여 본인은 긍정적으로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 교단 목사님들이 비록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에 신실한 목회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설교하고 목양하려는 열의를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연구하는 열의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단 목사님들은 신학적 연구와 목회적 실제를 접합하여 가르치기에 알맞은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위한 신학을 교수할 수 있는 역량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한 마음으로 열심히 연구하면서 가르칠 것을 또한 확신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목회자들이라는 점에서 가장 생동감 있고 실제적인 신학교육이 가능하리라 생각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우리의 미래는 조심스럽지만 희망적이라 생각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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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황과 신앙적 지향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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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역사의 상황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 있는 현재의 교회 상황은 어떠하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신학적 지향점은 무엇입니까? 이것에 대하여서 우리 교단의 교회질서의 전문에 언급되어 있다고 생각 됩니다. 교회질서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후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그의 신실한 일군들의 섬김으로 조국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성장의 이면에는 율법주의, 반율법주의(反律法主義), 자유주의, 신비주의, 기복주의, 세속주의, 은사주의, 번영주의, 성장 지상주의, 혼합주의, 교권주의 등 불건전한 사상과 이단들이 조국의 교회들에 퍼져있다. 이에 우리는 변질된 신앙과 교회의 모습을 자성하면서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에 입각한 개혁신앙을 회복하고, 성경적 교회질서에 충실한 개혁교회들을 건설하며, 이 신앙과 교회들을 후손들에게 상속하는 것을 시대적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소명을 감당하려는 우리 교회들의 명칭은 대한예수교 개혁회 (영문: The Korean Reformed Churches)이다. 우리는 세계 개혁교회의 세 일치신조인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및 돌트신경을 우리 교회들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며, 장로교의 신앙고백문서인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 문답을 존중한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질서는 1618-19년 돌트 총회에서 채택된 돌트 교회질서를 근간으로 한다." 전문은 크게 세 가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첫째,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 아닌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 아닌 것은 "율법주의, 반율법주의(反律法主義), 자유주의, 신비주의, 기복주의, 세속주의, 은사주의, 번영주의, 성장지상주의, 혼합주의, 교권주의 등 불건전한 사상과 이단들"입니다. 여기서 열거된 항목들은 우리의 교회현실에서 혼재되고 혼합된 형태로 교회 내에 상존하고 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계시 개념이 사라지고 나니 성경은 옛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적 표현물 정도로 여기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사역으로 계시가 완결되었으며, 따라서 계시가 끝이 났다는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비주의, 기복주의, 은사주의, 혼합주의, 세속주의 등이 발흥할 수 있는 토양이 된 것 같습니다. 계시역사의 흐름을 잘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율법주의 경향은 그리스도 사역으로 일어난 신약의 대 변혁이라는 성격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반율법주의 경향은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 종교를 사변적으로 접근한 것에 기인했다고 여겨지지만, 현재 한국 교회 현상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이라는 개념도 희미해진 것 같습니다. 장로교가 사라져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많은 장로교회들이 그 고유한 신앙적인 특성을 상실하고 은사주의, 신비주의, 인간중심적 신학으로 돌아 가버린 것 같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가르친다고 하면 심지어 장로교 목사와 신자들에게서도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교회의 신앙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을 전파해 온 결과라고 생각 됩니다. 둘째, 이런 상황에서 둘째 번 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혁신앙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개혁신앙이라고 하면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정신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성경의 권위만을 따르려고 사력을 다 하였으니, 우리도 성경의 권위만을 따르려는 정신을 견지하고 사력을 다 하여 그것에 헌신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자세는 사도들과 교부들의 신앙 자세로 돌아가려는 자세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은 성경 구약과 신약을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에서 이해하여서 통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부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사도들을 따라서 성경을 이해하여 보려고 무한히 노력하였습니다. 물론 초대교부들은 헬라 철학적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이해는 사변적이기도 하고 풍유적이기도 했지만, 계속 깨달아 가는 과정에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신앙이 그들을 이끌었기 때문에 점점 더 바르게 성경의 의미들을 깨닫는 쪽으로 나아간 것으로 생각 됩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교리만 해도 오랜 논의를 거쳐서 나중에 정립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개념은 이데아의 세계와 비슷한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후대의 사람들 중에는 플라톤을 일반적인 은사를 가장 크게 받은 사람으로 인정하기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성경의 개념과 사변적 개념이 구별이 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깨달아가는 과정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도들의 접근 방식을 따라서 성경을 접근하여 이해하려고 무단히 노력하였습니다. 심지어 천주교 신학의 기초를 놓은 사람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까지도 성경을 근거하여 해답을 구하려는 노력을 무단히 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신학대전'은 이런 노력의 산물이라 여겨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루터(Luther)와 칼빈(Calvin)은 적어도 사도들과 교회 초기의 교부들의 정신을 따라서 성경의 권위만을 의존하려고 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결과 루터에게서는 이신칭의라는 보배로운 진리가 확립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칼빈에게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인 기독교 강요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칼빈의 후예들은 알미니우스 추종자들의 항변에 즈음하여 TULIP이라는 핵심진리들을 확정했습니다. 칼빈의 가르침이 그렇게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들도 이런 전통을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 됩니다. 셋째, 전문에서 말하는 것은 신앙고백서들입니다. 전문은 세 일치 신조들과 웨스트민스터 문서들의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을 잘 정리 해 놓은 것으로 제시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 신조들이 개혁주의 신앙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조들의 가르침을 따르며 존중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얻는 가장 큰 의의는 옛 교회와 현재의 교회가 같은 신앙으로 맺어진 하나의 교회가 되게 하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믿음이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하나라는 것은 그 믿고 고백하고 이해하는 바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을 통해서 옛 교회와 지금의 교회가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 성도들이 믿고 고백했던 가르침이 현재도 동일하게 믿고 고백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참으로 의의가 있습니다. 믿음은 개인이나 개교회의 것만이 아닙니다. 믿음은 온 교회의 것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지 못한 믿음은 객관적인 믿음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신학적 가르침이라고 할지라도 보편 교회가 공유하고 인정하는 것이 못된다면, 그것은 개인적이거나 분파적인 것이거나 국지적이고 또는 한시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의 신앙고백들은 오랜 교회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받아들여져 온 것인 만큼 신뢰성과 보편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 교회가 하나가 되도록 하는 지침으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생각할 때에 교회가 신앙의 표준으로 삼은 신조들도 교회의 논의와 연구에 의해서 수정 가감 및 보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상의 신조들도 교회가 해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랜 기간동안 형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시기에 특수한 사람들과 상황을 거치면서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진 것이기 때문에 제한성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조들도 성경에 따라 교회에 의해서 수정, 가감 및 보완을 논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열려져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조들과 교의는 성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또한 우리는 신학 활동을 하고자 합니다. 즉 개혁하는 신학을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개혁하는 신학에는 캐논인 성경말씀에 합한 것이라면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 기조가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참다운 개혁은 끊임없이 개혁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참된 것을 지키는 참된 보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보수는 성령과 성경말씀에 복종하는 보수임을 명심할 필요도 있습니다. 교회가 성령과 말씀 '위'에도 '앞'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령과 말씀 '아래' 있으며 '뒤'에 있습니다. 곧 종속된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믿음의 표준으로 삼은 신조들도 성령과 말씀에 종속하는 위치에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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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학의 가능성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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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개혁교회가 신학교를 출발 시켰으니, 이제 신학이 무엇이며, 신학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신학'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이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는 근래에 신학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시되고 있다는 현실 인식 때문입니다. '신학'이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을 시도합니다. 어그스틴은 신학을 "신격에 관한 합리적 논의"라고 했습니다. 루터파와 개혁주의 학자들도 신학이란 말이 가진 의미와 조화되도록 '하나님에 관한 지식 혹은 학문'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이 단순한 정의에 사람들은 약간씩 더하여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즉 신학은 "하나님과 신적인 일들에 대한 학문" 이라거나 혹은 "하나님과 그의 우주에 대한 관계의 학문" 따위의 설명을 더하기도 했습니다. 쉐드는 "무한과 유한, 하나님과 우주를 아울러 관계하는 학"이라고 했습니다. 워필드도 쉐드와 비슷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우주에 대한 관계를 논하는 학"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빙크와 아브라함 카이퍼와 하지의 정의는 계시적 측면을 부각시킨 우월한 면을 가진 것 같습니다. 바빙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학문적 체계, 더욱 특수하게 기독교 입장에서 그가 자기에 관하여 자기의 말씀으로 교회에게 계시하신 그 지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는 두 종류로 구별을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대상으로 한 하나님 지식으로서의 신학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대상으로 한 학으로서의 신학"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앞의 것을 "성경에 포함되고 사람의 유한한 인식력에 적응하는 모형적 하나님의 지식이요, 후자는 계시된 하나님 지식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통찰에 붙이는 학"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미루어 생각하면, 아마도 전자는 자연계시적 측면을 의미하며, 후자는 특별계시적 측면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지는 신학의 대상을 성경의 진리들과 사실들에서 찾습니다. 신학자는 이 찾은 것을 "상호 내면적 관계에 의하여 수집, 인증, 정렬, 전시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의 경우는 성경 안으로 국한 시키는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이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경험을 초월하는 지식을 가질 수 없으므로 초월자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지식이라면 그것은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신앙으로 받아들인 지식은 학적인 체계로 구성할 수 없는 지식이기 때문에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논리를 받아들이고 신학을 논하려고 하면 결국 가능한 것은 인간이 가지는 도덕적 종교적인 주관적 경험과 판단을 신학의 근거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에는 모든 신적인 요소들을 경험적 세계의 것으로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관주의 신학과 비신화화 신학이 등장하였고, 극단적으로 인간세계의 반영으로서 신학 즉 하나님 없는 인간학 내지 인간사회학으로서의 신학으로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다 신학의 범주 안에 받아들이며,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하려는 다원주의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성경 진리의 절대성을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앞에서 신학자들이 정의한 것은 설수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신학은 학문으로서 자격을 잃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합니까? 해답은 위에서 말한 개혁자들의 관점에 있는 것으로 생각 됩니다. 계시 특히 특별계시를 인정하는 데 해답은 있습니다. 사람이 초월적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맞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어두워진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물리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초월적인 하나님을 알 수 없다-이는 칸트적 인식론으로서 기계적인 논리이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어두워져서 절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여서 부인하고 거절합니다-이는 영적인 문제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인간이 만드는 신은 절대자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며, 인간이 그린 인간의 한계 내에 있는 우상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참 하나님을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지식이 하나님 자신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과 세계를 관계하시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든지 이와 달리 설명하는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친히 드러내어 보여주시고 밝히시고 또 인간을 일깨우시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렇게 하신 하나님을 성경은 일하시는 하나님(요5:17)이라고 했고, 이렇게 자신을 알리시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천지가 생겨났고, 또 자기의 피조물의 우두머리인 인간에게 자기를 알려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대상과는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에게 경험적으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허무주의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한 구석에 들어와서 사람을 지배하는 허무를 떨쳐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절대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물질 즉 분자나 원자 혹은 에테르나 파장이 영원히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영원한 창조주가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창조 세계의 이치와 생명현상의 정교함은 영원한 창조주를 전제하는 것이 어떤 물질의 영원함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타당하게 여겨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계시가 있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세상 역사의 어디에선가 자기의 존재를 계시하는 곳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타당성이 사람마다 믿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 됩니다. 이런 논리적 타당성은 논리적인 타당성일 뿐, 믿음에 이르는 것은 특별한 은혜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논리적 타당성은 믿음을 얻은 자에게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이점이 있다고 생각 됩니다. 믿음을 얻은 자에게는 이런 논리적 타당성이 이해에 안정성을 준다고 생각 됩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계시가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신뢰함에 있어서 든든해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을 얻은 자는 안심하고 계시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신학은 가능해집니다. 사변적 철학적 신학이 아니라, 계시에 근거한 신학이 가능해집니다. 이런 후에 철학적인 정리와 창조된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도 더욱 넓고 깊게 가능하리라 생각 됩니다. 특별 계시를 바탕으로 일반 은총의 영역에 대한 이해도 더해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특별 계시를 받고 보면, 일반 은총의 세계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라는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계에도 신자가 취해야 할 마땅한 태도와 행동이 있게 마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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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특별 계시는 어디에 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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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특별 계시는 어디에 있습니까? 특별계시는 현재형이라기보다 과거형이라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이 특별 계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있어왔으며, 역사의 정점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의 계시를 위해서 인류역사의 처음부터 역사에서 일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계속하여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선택되고, 이스라엘이 선택되고, 이러한 선택의 정점에 그리스도가 서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하여 계시는 절정과 완성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역사는 계시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계시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물론 성경 속에는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성경을 계시 역사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속의 모든 기록들이 계시역사의 과정 속에서 직조되어 나온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 계시역사를 염두에 두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찾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성경은 사람의 책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책 곧 계시자의 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시의 역사가 완성되고 종결된 상태로 성경을 이루고 있으니, 우리는 성경 속에서 계시를 보게 되며 계시된 바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계시를 만나려면 우리는 성경으로 가는 것으로 족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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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록으로서의 성경과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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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성경으로 가면 우리는 계시를 만납니까? 계시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문자로 기록된 글을 만납니다. 즉 우리는 문자로 기록된 계시를 만나는 셈입니다. 계시는 사건이요, 그래서 계시 역사를 형성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의 의미와 의의를 암시하고 설명하는 글로서 만납니다. 계시는 문자화 되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로 된 글을 읽어야 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이성을 사용하지만, 이성을 바탕으로 삼아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 곧 성령이 주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개혁신학자들은 경건이라는 말로 이것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루터는 신학 방법론으로서 기도(Oratio)와 묵상(Meditatio)과 시련(Tentatio)을 강조했으며, 칼빈 역시 신학을 위해서 경건을 신학 방법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중립적인 태도 즉 중립적 추구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객관적 사변의 지적 놀음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Calvin, Inst., Int. li).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경건이 요구된다고 했습니다(Inst., I, 2, 1). 그리고 그에게 경건은 교리(doctrine)와 연결되어 있습니다(Inst., Int., lii). 그는 경건대전(the whole sum of piety; pietatis summa)을 썼습니다. 그의 종교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였습니다. 경외 없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H. 바빙크도 칼빈의 관점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빙크 역시 성경과 신앙고백을 논하면서 '신앙고백은 모든 신자들의 의무요 또한 그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명령'이라고 했고, '온 마음과 심령으로 참되게 믿는 사람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신앙고백은 교리 곧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결과를 가르치는 가르침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뜻으로 성경의 계시를 받아야 할 것을 그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 계시 곧 교리를 다루는 방법으로 '믿음'과 '고백하게 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신앙고백이 이 순서를 따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내용으로서 교리문답과 신앙고백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교리에 대한 고백을 말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경건과 같은 맥락입니다. 칼빈이나 바빙크가 말하는 경건은 인간이 닦고 쌓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계시의 가르침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 곧 믿음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경건은 이러합니다. J.G. 메첸, B.B. 워필트, L. 벌코프 등에게서도 경건의 중요성을 보게 되며, 이들이 말하는 경건 역시 앞의 두 사람과 같은 성격의 것입니다. 글의 형태로 주어진 계시를 대면하는 데는 경건이 절대적임을 개혁신학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건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적인 것이요 따라서 계속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항상 믿는 자이기 때문에 항상 믿음으로 계시를 대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학하는 자의 신학적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학하는 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기도로 하나님께 묻기도 하고 그 답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기대하는 중에 기다리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당장 알지 못해도 가다가 보면 깨닫게 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깨닫지 못한다면 주님 앞에 설 때에 물어볼 것이라 생각하고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성보다는 믿음이 신학이라는 과업을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은 지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성을 초월하기도 하지만 지성을 포함합니다. 지성은 믿음을 섬기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성은 믿음 안에서 믿음을 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지성은 절대적으로 자의식적인 하나님을 원천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유하는 지성이 아니라, 믿음을 섬기는 지성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는 학자이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을 바르게 드러내고 밝힐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문제는 이런 점에서 실패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 됩니다. 반면 서구의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이 점을 아직은 견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같은 성질의 말씀을 유지하는 것은 교회가 받은 교리에 합한 말씀을 설교하기 때문이고, 또 목사들이 함께 공부하고 나누는 전통을 유지하기 때문이라 생각 됩니다. 이런 점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점이라 생각 되며, 또 이미 우리 교단의 목사님들이 같은 인식을 가지고 함께 노력하고 있는 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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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계시 해석의 방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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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계시를 청종함을 말했으니, 이제는 믿는 자가 계시가 기록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가를 생각할 차례인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에서는 분명하고 확실하며 충족합니다. 왜냐하면 계시의 종국인 그리스도의 사역이 일어났고 따라서 믿음의 내용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계시의 종국성에서 보면 분명하고 확실하고 충족한 내용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했었는지는 여기서 논할 수도 없고 또 다 알 수도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할지라도,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서 계시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곧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계시를 이해할 때에 우리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신약에서 계시는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구약의 계시는 어떻게 그것이 구원의 계시가 되는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구약 계시와 신약의 계시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제한 것으로 성격상 같은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심판과 구원의 계시가 되는가?' 아니면 '구약 계시는 좀 불확실하고 불분명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것을 믿는 자들을 어여쁘게 보아 주셔서 구원의 계시가 되었는가?' 아니면 '언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이라 할지라도 삼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니까 통일성이 없다고 할지라도 심판과 구원의 계시로서 인정이 되는 것인가?' 그래서 '언제든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따르려고 했던 사람은 다 삼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구원이 되는가?' '이런 경우는 구원의 중보자는 어떻게 되는가?'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신학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성경 본문이 기록된 역사적 배경을 가능한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며 이전 역사와 이 후 역사에서 연결점과 차이 등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 기록된 본문의 원래 언어를 이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번역으로서는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고, 또 신학적으로 이해가 부족함으로 야기된 오역들도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9: 27절의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는 번역은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시고 또 그가 셈의 장막에 거하시고'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이와 유사한 예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시편 10:3-4, 창세기 32: 28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이런 구절들은 구약과 신약 전체적 구도를 이해하는데 중대한 시각을 제공하는 구절들이라고 생각 된다). 따라서 우리는 원어에 대한 문법적 이해와 역사적인 이해와 신학적인 이해가 필요함을 인식합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성경 해석 방법이라고 배워왔습니다. 현재에 사용되는 문예적인 측면은 큰 틀에서 문법적인 해석에 포함시킬 수도 있겠지만 좀 억지 같은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문법적인 해석을 문예적인 해석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문법적인 시각은 문서로 기록된 성경의 문예적인 측면을 간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요, 또 문법은 큰 틀에서 문예에 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듣고자 하지, 우리 인간의 생각과 실존적 정황을 성경에 덧붙여서 그것을 통하여 성경을 읽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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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학적 해석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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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적 해석이 중요함을 이미 말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해석도 중요합니다. 본인은 역사적인 이해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갈수록 더욱 깨닫습니다. 하지만 신학적 해석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학적 해석을 시도했다고 보이는 노력들을 생각해 봅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언약' 개념이 역사적으로 유아세례 문제와 더불어 중요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언약 개념은 성경을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볼 때나 전체적으로 볼 때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형론, 약속과 성취, 예언과 이루심, 그림자와 실체 같은 주제들은 신구약의 통일을 이루는 개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들은 성경이 상호 연결을 명시적으로 짓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믿을만한 개념들이라 생각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하여 창조, 여호와 하나님, 에덴, 안식, 씨, 땅과 기업과 상급, 복, 하나님 나라와 그 통치, 이스라엘과 그 선택, 율법, 성막과 제도로서의 제사와 제사장, 성전, 법궤, 속죄와 구원, 거룩, 메시야, 선지자, 왕, 백성, 선택, 신인의 교통, 경외, 등등의 수많은 주제들도 거의 명시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약과 신약은 서로 연결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역사의 흐름에 따라 살피면서 이 주제들이 그 출발 상황과 진행과정에서 성경 속에서 어떤 의미와 변화를 가지며, 신약에서 어떻게 귀결 되는 지를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과 입장이 다른 신학자들도 구약성경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면서 제시했던 개념들 역시 위에서 제시되었던 개념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젤(G. Hasel)은 이러한 중심 주제들이 구약성경의 구성적인 중심(organizational center)이 아니라 신학적인 중심(theological center)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제들을 신약에까지 확대하여 연구하고 이해하여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성경의 계시를 더욱 바르고 풍성하게 이해하고, 누리며, 설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의 신학적 해석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계시 역사 속에서 주어진 이 모든 주제들이 계시가 증언되고 있는 성경 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시의 역사를 살피면서 시대마다 주어진 계시를 이해하고, 그것을 종합하여 봄으로서 계시를 전체적으로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전체적으로 계시를 잘 이해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도 계시를 잘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전체를 보아야 부분을 바르게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체를 보는 것은 시작과 전개와 종결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각 주제들이 어떤 경로를 거치고 변화의 옷을 입으면서 신약에서 어떤 형태로 정착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후대의 밝은 이해는 이전 혹은 옛 시대의 것을 이해하는 데 빛을 비추어 줍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이 세상의 복입니까?(히6:13-20)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주어졌던 땅과 부 역시 이 세상의 땅과 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복을 세상의 땅과 부에 적용시키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복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설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가 반성하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성경의 모든 주제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크게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 곧 율법과 복음의 관계까지도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 계시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시 역사적인 관점을 성경을 해석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의 성경해석학에서는 계시 역사가 성경을 해석하는 하나의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미약해 왔던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론들이 등장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계시 역사적인 눈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저는 설교를 하면서 경험적으로 더욱 깨닫습니다. 우리는 성경 해석학의 다른 도구들도 잘 사용하면서 계시 역사적인 구조를 관심을 가지고 살피는 신학을 하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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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해석학적 도구로서 계시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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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역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타당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계시면 계시지 역사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라는 반문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의 의식에 계시라는 말은 친근하게 다가오는 데 거기다가 역사를 덧붙여서 '계시역사'라고 하는 것은 좀 낯이 선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만큼 이 개념은 우리에게 좀 낯선 개념일 수 있겠습니다. 라이트는 "성경의 계시는 역사와 뒤섞여 있다는 것이 독특한 모습이요 특성이다"고 했습니다. 계시가 역사와 뒤섞여 있다는 말이 계시와 역사가 뒤죽박죽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를 통해서 주어졌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 됩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라는 말은 역사의 어느 한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주어졌다는 암시가 들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선(線)적으로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시는 역사를 따라서 반복적으로 주어져야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선택된 역사상 다양한 시대 사람들에게도 똑 같은 성질의 계시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하여'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은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게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 역사를 통해서 계시는 반복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이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기독교는 적어도 약 2000년 전에 갑자기 나타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 변증되는 셈입니다. 기독교는 어느 누구도 인간이 창안할 수 없는 종교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오랜 역사 곧 인류 초기부터 계시가 있어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증언합니다. 때문에 성경의 증언대로 따른다면, 기독교는 인간이 자기 뜻대로 창안할 수 없는 종교가 됩니다. 그리고 계시가 인류처음부터 있어왔다면 그 계시를 따라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독특성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는 인간에게서 나온 종교가 아니라 계시자에게서 나온 종교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가능하게 합니다. 따라서 계시자가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기독교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종교라는 사실을 '역사를 통하여'라는 말은 내포합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반복적으로 계시해 오셨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곧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식으로 계시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불쑥 불쑥 인간에게 어떤 형태로 나타나셔서 '나 여기 있다'는 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계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H. M. 오만은 "하나님은 "사전에 계획된 그 계획에 입각해서 당신의 계시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전적으로 본인은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존재 자체를 계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계시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비주의적인 경향이라고 생각 됩니다. 이런 경향을 가진 신학자들에게서 이런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획된 자기의 계획에 입각해서 계시하신다면, 이 계획이 어떤 성격의 것이며, 그 계획 속에 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가에 대한 것을 계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택한 백성이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시하면서 하나님의 실존하심과 성품 역시도 나타내신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실존하심과 성품이 그의 계획 실행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어진 계시가 성경에 집성되어 있습니다. 성경 자체는 계시의 집합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계시를 위하여 성경이 보여주는 역사를 선택하여 사용하셨습니다. 성경 속에 들어 있는 역사는 하나님이 계시를 위하여 선택하신 역사입니다. 장소와 지리, 나라들과 사건들, 인물들, 제도와 의식들 즉 성막제도, 제사제도, 국가와 그 제도와 이스라엘, 죄악과 멸망과 포로, 돌아오는 사건들과 주변 나라들의 흥망성쇠 등은 계시를 위해 선택된 역사입니다. 따라서 모든 역사가 계시가 아니라, 선택된 역사가 계시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개념은 범신론적인 계시관과 구별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증거하고 있는 계시역사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의 역사는 우리 인간이 이해 못할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실제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또 성경이 밝혀 주는 역사가 세상 역사를 이해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역사는 종교적 신화나 전설과는 전혀 다르며, 종교적인 성격을 덧붙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 역사는 하나님이 선택하여서 자기의 계시를 드러내신 실제 사실적 역사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시대마다 기록자를 세우셔서 사건을 기록하게 하셨으며,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창조와 에덴 동산과 타락의 기사들까지도 그것을 본 사람 아담에 의해서 기록되어서 후대의 선택된 세대에게 전해졌다고 추정됩니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게 하시려고 아담에게 긴 수명을 주셨는지도 모릅니다. 둘째, 따라서 역사 속에 나타나 있는 계시는 주체성을 가진 인격성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시는 주체적인 시작하심과 인도하심과 목표가 있으며, 그 속에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암시 혹은 분명하게 밝혀져 있음이 틀림 없습니다. 때문에 계시에는 일관된 하나님의 의지가 있으며, 이 의지에 의해서 통일성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계시의 통일성은 필연적인 그 성격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이 통일성 때문에 우리는 동일한 성질의 계시 즉 동일한 의미의 말씀을 여러 시대의 계시들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계시는 시대마다 동일한 성질의 내용이 반복해서 주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밝음의 차이와 상황의 변화와 변혁으로 인하여 차이점이 발생하지만, 동일한 성질의 내용으로 인하여 동일한 성격의 계시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반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적인 차이로 인한 외표적인 차이와 계시 내용의 명암의 차이로 인한 차별성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계시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넷째, 계시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말한다는 것은 계시의 시작과 이끄심과 종결까지 주의해서 연구하고 살피고 파악해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처음과 끝을 보는 눈 즉 전체를 보면서 부분을 보도록 요구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부분들을 전체 속에서 이해할 수 있고, 전체를 부분과 연관지우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결의 특성 또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결에 비추어서 진행과정은 물론 시작에 대해서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 철학에서도 한 철학자의 논리를 파악하려면 처음과 진행과정과 결론을 파악해야 바르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도 하나의 계시체 곧 하나님이 자기의 계획을 드러내신 계시 역사를 보여준다면,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엉뚱한 해석과 이해가 설교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를 들면,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얻고 부자가 된 것을 신약의 신자가 이 땅에서 잘 되고 부자 되는 것으로 해석함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신약의 신자가 이 땅에서 땅을 차지하고, 무병장수하며, 자손이 출세하며, 부귀공명을 누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언약의 맥락에서 약속의 땅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하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나라와 신령한 복과 연결지어서 이해해야 합니다(히6: 13-20, 엡1:1-14, 마5: 1-12 참고). 특히 신약의 대 변혁(히9:10)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설교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체를 이해하면서 부분을 이해하는 눈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 교회는 이것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물질주의적 기복신앙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이것을 막고 교정해 줄 해석학적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땅과 복이 결코 이 땅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해석학적 원리로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계시역사가 해석학적 척도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달한 결과라고 생각 됩니다. 본인은 이런 관점을 제시하면서 가르치고 설교했을 때에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 가장 많은 저항을 받았었습니다. 때문에 필자는 계시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면서 차이점을 이해하는 시각이 참으로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 있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은 다른 근거를 제시하면서 복에 대한 바른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계시의 전체를 보게 하고, 또 큰 틀에서 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변혁을 겪었는지를 보게 하고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바른 관점을 이해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라고 생각 됩니다. 다섯째, 이제 계시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통일성과 차이점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통일성을 먼저 생각하건대 신학적 핵심주제를 찾는 노력들에서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핵심 주제를 찾는 것은 통일성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신학자들이 구약의 핵심 주제에 대한 제안들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하젤의 책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주제라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 주제 찾기를 강하게 거부한 폰 라드까지도 결국 구약의 핵심적인 주제를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개념에 서 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통일된 중심개념을 찾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중심 주제는 계시역사의 통일성을 보여준다고 생각 됩니다. 성경의 계시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런 노력을 했다면, 성경에서 하나님 중심의 계시성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중심주제로의 통일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신구약을 아우르는 중심주제의 통일성을 말한다면 우리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데 이의가 없다면, 구약의 주제도 예수 그리스도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양한 모형과 그림자로서 또는 예언으로서 그의 인격과 사역에 대하여 말씀하실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구약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요5:39, 눅24:25-27, 44, 46-47). 이런 점에서 '오실 그리스도'와 '오신 그리스도'로 본 루터의 관점은 지금도 유념해야 할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 됩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의 인용구절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해석되고, 해석된 그 의미에 추가되는 그리스도 중심적 변형을 가하면서도 그것이 구약 성경 구절의 가르치는 바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은 신약이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읽어야 할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중심한 통일성을 성경은 제시해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차이점이라면 어떤 것을 핵심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구약 역사 기간에도 시대적으로 차이점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계시의 방편인 에덴 동산, 오래 산 사람들, 홍수심판과 방주와 무지개 언약표시, 추정되는 기록물 등은 아브라함 이전 시대의 계시 수단이요, 아브라함 시대는 약속을 확증하는 언약의 체결 형식들(창15장, 17장, 22장)이 계시 수단이었으며, 모세 시대에는 성막과 제사제도가 계시 수단이었으며, 다윗 및 열왕 시대에는 왕직과 왕국이 계시 수단으로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계시 수단들은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차이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메시야의 사역을 이루시고,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예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을 보내심으로 구약이 말하던 이 세상 질서의 종말이 도래했으며,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 중에 거하시면서 다스리는 새 질서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the coming of the Kingdom)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는 사죄가 이루어졌고, 따라서 사망 권세가 끝나고, 하늘 생명 곧 성령이 충만한 나라입니다. 이 세계에 들어오는 자는 모두가 죄 사함을 받고 하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새 세상에서 살게 된 새 피조물이 됩니다. 구약 시대는 아직 이 땅에 속한 것을 가지고 신약의 하늘 세계를 보여주려고 했었지만, 신약 시대에는 성령으로 구약이 지로(指路)했던 실체를 드러내셨습니다. 여기서 확실한 하나의 원리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신약은 구약이 땅의 것을 가지고 보여주려고 했던 것을 성령으로써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신약의 실체입니다. 성령은 보이지는 않지만, 부활의 생명력 곧 하늘의 생명력으로 강력하게 역사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룹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예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땅에 속한 그림자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의 것들로 바꾸어져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땅에서 복이라는 것은 하늘의 신령한 복 즉 성령의 복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복은 신약에서 성령을 받아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마음이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등등 8복에서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바울이 말한 성령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어떤 복보다 더 크고 참된 복이며, 또 궁극적인 복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이미 최고최상의 복을 받은 사람인 줄 알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물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가난하고 힘들어도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을 따라서 저 안식을 향해서 찬양하며 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을 누리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약의 독특성 즉 차이점입니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이것을 설교하고 강조해야 합니다. 이렇지 못할 때에 신자의 신앙은 이 땅의 것에 매일 수밖에 없고, 이 땅에서 하늘 사람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이 땅의 부에 대한 공평한 분배 문제 등은 새 사람의 공동체에서 다루어져야 하며, 교회가 이런 것을 먼저 시행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는 가장 강력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재물의 공평한 분배는 세상이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계시역사를 생각하면 당연하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계시적인 의미가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자적인 의미로 설명이 시작되기 이전의 사건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설명 없이 사건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한 의미는 오랜 후에 혹은 신약에 와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창세기 32:28절에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부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에는 분명히 어떤 큰 의미가 들어 있을 것인데, 창세기 32장에는 그렇게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문맥적으로는 야곱이 환도뼈가 위골된 상황에서 천사에게 복을 간구했었고,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천사가 취한 조처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야곱'이라는 이름과는 대조되는 어떤 의미를 가진 이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없습니다.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가진 문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싸우실 것이다'(laer'f.yI)라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싸워) 이겼기 때문이다'(lk'(WTw: ~yviÞn"a]-~[iw> ~yhi²l{a/-~[i t'yrIôf'-yKi()라는 완료형 구절은 예언적 과거로 이해하면 실제는 미래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뜻은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길 것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렇게 되면 뜻이 명료해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계셔서 야곱과 그의 자손을 대적하는 이방신들과 이방 민족들과 싸워주시겠다는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한 약속을 반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표지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앞으로 자기의 힘으로 대적과 싸우지 아니해도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야곱을 위해서 싸워주실 것입니다. 야곱은 실제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자입니다. 이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사건이 환도뼈를 위골되게 만든 사건입니다. 환도뼈가 빠진 상태에서는 싸울 수도 도망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바로 이런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주어져 있는 의미이지만 그리고 암시 되어 있는 의미이지만, 이것은 구약의 긴 흐름 속에서 죄악과 멸망과 돌아오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훨씬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적으로 이해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육신에 대하여 죽고, 성령으로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의미를 창세기 32장의 본문은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후에 야곱 자신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에서 끊임 없이 반복해서 가르쳐집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요셉에게 보내면서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라고 하면서 결국 요셉을 만나게 되는 사건,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땅을 얻는 일, 보잘 것 없는 사사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 막내였던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그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메시야 왕으로 두시면서 다윗의 죄악의 상징인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신 일, 이스라엘이 교만하여 범죄하자 망하게 하시며 바벨론으로 포로 되게 하신 일과 다시 돌아오게 하신 일, 예수를 믿고 육신이 죽고 영으로 사는 자 되는 것 등이 다 '이스라엘'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야곱 당시의 사건에서 그 의미가 밝혀진 것이 아니라, 계시역사의 진전과 종결 사건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적인 의미는 문자적인 뜻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인 뜻을 넘어서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그 종결 사건을 통해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는 역사적인 전개와 결말을 봄을 통해서 명확하게 이해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환도뼈가 위골 된 사건이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설명이 없지만, 역사가 진행됨으로 분명히 밝혀지기 때문에 비로소 '환도뼈 위골'이나 '이스라엘'이 가진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창세기 32장을 읽을 때에 밝혀진 계시에 비추어서 우리는 그 사건을 이해하게 됩니다. 계시는 역사 속에 길게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 한 시대에 국한 되어 있는 텍스트는 그 계시를 다 담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밝은 빛에 비추어서 암시적이고 희미한 것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신약의 '새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거의 모든 주제들이 이러한 이해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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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새 이스라엘'은 교회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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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자'라면, 새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야곱 한 개인 속에 그 자손이 들어 있는 이름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개인의 이름이기도 하고 공동체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새 이스라엘' 역시 개인의 이름이기도 하고 공동체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로서 오셨습니다(마2:15, 호11:1, 출4:22). 그리스도는 개인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자녀인 공동체 이스라엘로 오셨습니다. 즉 공동체의 대표요 대리자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인 그리스도 안에 그의 자손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자손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고난을 당한 후에 자신이 낳을 공동체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는 '내 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 18).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것을 위하여 자신이 고난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16:21). 이 공동체의 사람들은 바울의 말대로 육신으로는 죽고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롬6:16-23). 주님은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핍박과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1,요16:33). 이런 사실을 구약의 메시야요, 성도였던 다윗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시편 10편에서 참된 성도와 악인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예배하는 자리에 있고, 또 한 동네에 있습니다. 그런데 악인은 자기 욕심을 따라서 종교생활을 합니다. 자기 욕심을 채워주면 여호와를 찬양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호와를 경멸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자기는 대대로 망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들에 의해서 짓밟히고, 억눌리고, 세상 소유물을 빼앗겼기 때문에 가난하게 된 자는 여호와께 하소연합니다. 악인은 여호와 없는 세상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다윗은 이방인으로 간주하면서 그 멸망을 선언합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을 수도 있으면서도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불신자입니다(롬1:21,28 참고). 다윗은 이런 악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억눌리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마5:3)의 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이런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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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우리 신학교의 교수 방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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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학교의 교수 방향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학교는 우선 야간 수업을 주로 할 수밖에 없는 사정입니다. 그래서 수요일을 뺀 월(月), 화(火), 목(木), 금(金)일 저녁 시간을 주로 이용하여서 수업을 하고자 합니다. 여기에 맞게 크게 교의학, 역사신학, 구약학, 신약학으로 나누어서 하루에 한 분야씩 수업을 할 것입니다. 각 분야에 대한 우리의 방향성은 아래와 같습니다. 교의학: 교의학은 균형미 있는 교회교의를 확립시켜서 교회에 바른 신앙의 터전을 제공하는 신학분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선배들이 물려 준 학문적 유산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연구하고 계승하며, 나아가서 계시역사적인 관점에서 본문을 주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교의를 확립시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텍스트 북을 공부하는 것은 물론 칼빈의 기독교 강요 및 신앙고백서들을 공부하면서 계시역사적 시각에서 이해하고 정리하도록 지도할 것입니다. 특히 신앙고백서들과 텍스트 북을 연계하여 공부하도록 할 것입니다. 역사신학: 역사신학은 교회의 역사를 이해함으로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받으며, 현실교회의 역사적 위치와 상황을 반성하며, 또 앞으로 나아갈 지침들을 얻고자 합니다. 세계 교회사는 물론 한국 교회사도 이런 목적을 가지고 연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보여주는 인간 역사의 모습과 교회사가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을 함께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상고하도록 가리킬 것입니다. 구약학: 구약학은 구약시대의 계시역사를 살피면서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과 그것이 신약의 복음과 어떻게 연결되는 지를 파악하도록 하는 신학적 노력에 힘을 기울일 것이며, 이렇게 한 결과를 설교화 시키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 필요한 구약 언어(히브리어, 아람어)와 역사및 배경사를 공부하며, 또 고고학, 사본학, 정경론, 비평학 등에도 일가견을 가지도록 함께 공부할 것입니다. 신약학: 신약학은 구약계시를 잇기 때문에 그것의 연속적 성격과 차이점을 계시역사적인 구도 속에서 파악하고 이해하도록 하며, 구약계시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의 특별한 성격을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잘 배우고 설교화 하는 데 목표를 둘 것입니다. 그리고 학기 중에 취급하지 못하는 신학 분야들과 필요한 인문학적 과목들은 방학을 이용하여서 보충하도록 할 것입니다. 마감하는 말씀 지금까지 본인은 우리가 답습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말했고, 또 우리가 지향하고 따라야 할 신학이 개혁주의적인 신학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입장에서 좀 더 분명하게 이해되고 강조되어야 하겠다고 생각 되는 신학적인 요소들을 논의해 왔습니다. 그것은 신학적 해석의 중요 도구로서 성경의 모든 주제들과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는 계시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성경 해석의 도구로서 받아들여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신학교는 이러한 점들을 유념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신학전반적인 것은 물론 신학을 위한 언어들과 목회자로서 필요한 인문학적 소양을 위한 과목들도 함께 배워가려고 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교수들도 기본적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성경과 씨름하면서 배우고 깨달은 것을 학자들의 학문적인 토대와 접맥하면서 신학을 할 수 있는 역량이 갖추어져 있다고 감히 자단해 봅니다. 자랑 같지만, 우리 교단 목사님들은 학문을 할 수 있는 학문성도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더하여서 이런 말을 해 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서 배우려는 것은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에 모험을 감내하는 일이요, 고난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되는 것도 주님의 인도라고 믿는다면, 십자가 후에 부활이 있듯이, 캄캄하고 아득함 속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충만해 하고 즐거워하는 믿음의 비밀을 소유하게 되리라 생각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의지하면서 미약하고 작은 자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와 가난한 자로서의 위치를 잃지 않도록 주시하며 채찍질하여 주시기를 바라고, 또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섬긴다는 뜻으로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 모세가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게 했던 기도를 원용하여 본인은 기도하고 싶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를 원하노라'라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 제사장적 축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을 누리고 있지만, 현재 우리의 입장에서 모세의 용어로 기도하고 싶고 또 기도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같이 기도하는 자로서 부탁하고 싶은 것은 '너희가 무슨 개혁교회 하노?'라는 의식을 가지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의식은 적어도 삼위 하나님이 작은 자를 택하시면서 일해 오신 것을 망각한 의식이요, 이 세상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자만하는 자들이 가지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경쟁과 세상적인 화려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자들이 누리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 속에 있습니다. 이런 것을 경시하는 마음은 하나님 나라에 눈이 어두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차로 오가면서 길 위에서 익힌 라틴어 금언 하나를 인용하면서 제가 했던 강연을 돌이켜 보고자 합니다. 'Veritatis absolutus sermo ac semper est simplex(진리에 대한 설교는 절대적인 동시에 항상 단순하다). 이 말에다 저는 'Sed sermo mei neque absolutus neque simplex est'(그러나 제가 드린 말씀은 절대적이지도 않고, 단순하지도 않다)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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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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